Reading Diary
비밀편지 by 박근호 - 감정에 대하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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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에 내려오면 여느때보다 책을 많이 찾게된다. 본가는 어릴 때 한번 읽고 잊고 있던 책이나 언니들이 보고 방치해 둔 책이 가득 쌓여 있는 책 창고같은 곳이다. 학창시절에는 한참 비문학에 빠져 있었다. 이성적인 말로 명료하게 풀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들을 이야기로 물어내는 소설보다 명료하고 확실해 보이는 비문학이 끌렸던 시기가 있었다. 지루한 학창시절 동기부여를 위해 온갖 자기계발서를 사들이는가 하면 괜히 겉멋이 들어 읽지도 않을 <피터 드러커의 경영학> 같은 책을 사기도 했다. 유독 책에 대한 욕심이 많던 시절이라 일년에 몇백만원씩 책을 사들였고, 책을 버리지 않는다는 부모님의 철학에 따라 집에는 다양한 분야의 가볍고 무거운 책들이 쌓여 갔다.
5년 반만의 본 귀국 후 처음으로 본가에 머무는 만 24시간의 시간동안 나는 뒹굴뒹굴 거리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가져가기에는 무겁고, 처음보는 책들이 많아 먹거나 자고 있지 않을 때에는 계속 책이 손에 들려 있었다. 박근호 작가의 <비밀편지>는 언니가 2재작년에 사서 읽은 책이라고 했다. 다른 책들과 함께 가끔 연휴가 있으면 본가를 찾는 언니의 침대위에 널브러져 있던 것이 손에 잡혀 읽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었는지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내가 고등학교 시절 그랬던 것 처럼 유행을 타는 것인지, 요즈음에는 사람의 감정에 대한 에세이가 많이 들어온다. 언어, 태도, 삶의 방향을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감정을 어루만지는 따듯한 에세이가 주가 된다. 직전에 읽은 혜박의 <시애틀 심플 라이프>가 삶의 태도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었다면, <비밀편지>는 우리의 감정에, 정확히는 '사랑'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이성과의 사랑도 그렇지만 스스로의 감정에 대한 사랑도 자리하고 있었다. 우울함마저 따듯하게 그려내려 하는 작가의 마음은 어떤 감정도 허튼 것이 없으며 인정받고 사랑해야하는 소중한 감정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듯 했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우리가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무디다고 했다. 나는 꽤 대놓고 감정을 표현하는 편이지만 사실 내가 그럴 때 마다 당황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요즈음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사람들도 보다 익숙해진 듯 하지만 확실히 2-3년 전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말을 아끼고는 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나이를 먹을 수록 쉽게 내뱉지 않는 말이 되어가고, 우울해하거나 의기소침 한 모습도 나이를 먹을수록 보이기 힘들어진다. 아니, 정확히는 보이고자 하는 동기가 없어진다. 어릴 때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필요하면 위로를 해 주고 받을 거라는 순수한 의도와 기대가 있었다면, 나이를 먹고나서는 위로받아서 될 일도 아니거니와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아버린 것이다.
작가는 그런 사람들을 위로하듯 언젠가 스스로가 듣고 싶었던 감정의 위로를 독자에게 건낸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사랑의 말을 풀고 그 따스함이 널리 퍼져 모두의 마음을 촉촉히 녹여주길 바랐다.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이 비교적 누구에게나 실현 가능한 꿈이 되어가는 요즈음, 이런 에세이의 유행인지 내 마음이 끌리는 것인지 따듯한 책들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아직 평범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위로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스스로 언젠가 필요했던 위로를 기꺼이 건네는 이들이다. 그런 글들을 읽을 때면 세상이 전보다 따듯해진 것 같아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그 중 <사소하지 않은 사소함> 이라는 글이 특히 한 때 골몰했던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호주에서 홀로 5년 반동안 생활하며 내게는 꽤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그 중 하나는 <가족여행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외나 국내로 떠나는 몇박의 여행이 아니더라도 도시락을 싸서 가까운곳으로 가는 나들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한참 한국에서 살며 언제든 갈 수 있을 때에는 여간 귀찮은게 아니었던 나들이는 홀로 5년 넘는 시간을 살며 부러움으로 바뀌었다. 특히 명절이나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낼 때면 가족의 빈자리가 꽤 크게 느껴졌다. 처음 몇 년은 서럽다가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의 틈에 끼어 놀아보기도 하고, 더 나중에는 낯을 가리는 스스로를 깨닫고 집에서 홀로 편안히 명절을 보내고는 했다. 그러다 몇 번 지인의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갈 일이 있었는데 (아마 이곳에 가족이 없는 나를 배려해 초대해 준 것이다.) 함께 도시락을 만들어 해변가에 놀러가 다같이 크리스마스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고 놀다 낮잠을 잤다. (호주의 크리스마스는 여름이다) 뭐랄까. 함께 도시락을 만든다는 것, 돗자리를 펴고 않아 사진을 찍으며 놀다 도시락을 까먹고 질릴 때 까지 뒹굴거리다 집에 돌아오는 그 행위가 참 행복하게 느껴졌다. 전에는 왜 그토록 귀찮아 했을까. 사소한 일상의 한 부분이지만 늘 가지고 있어 깨닫지 못하는 행복이었던 것이다.
여행에 대한 글도 꽤 인상에 남는다. 여행객처럼 남을 신경쓰지 않으며 이상한 곳에서 감탄하고, 두리번거리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물어보거든 '여행중입니다' 라고 말할거라던 그는 사람들이 느끼는 여행에 대한 갈증을 풀어냈다. 여행을 가면 그곳에서는 아무도 우리를 모른다. 익명이 된 우리들은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적당히 사회에 반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의 자유를 만끽한다.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는 어떠한 기대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삶을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기 전에 스스로를 위해주어야 한다. 무례할 필요는 없지만 과하게 맞추어 살아갈 필요는 없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벅차 남을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하루 중 잠깐 있던 어떤 일에 불과할 순간을 위해 종일 마음졸이며 살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하고 살아갈 때 보다 나은 스스로를 가꾸기도 편해진다.
모두가 조금은 마음편히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남보다 나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누군가의 헌담을 기꺼이 꺼리기를, 그래서 조금은 모두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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